2022-01-19 10:26 (수)
Helmut Newton의 패션 누드 사진
Helmut Newton의 패션 누드 사진
  • 아이디어홀릭
  • 승인 2004.08.23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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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04 7/07 수요일_05:00pm

"헬무트 뉴튼의 작품세계" 세미나 / 2004_0723_금요일_06:00pm

선착순 80명 마감 / 참가비_10,000원

신청문의 Tel. 02_737_2505



관람시간_10:00am~06:00pm / 전시기간 무휴

작품설명회_매일 03:00pm 1회

입장료_5000원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1번지

Tel. 724_6316



패션은 한 시대, 한 사회의 이상과 현실을 반영하여, 꿈틀거리듯 생동하는 문화창조의 한 요소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의상, 헤어스타일, 화장, 장식적 요소 등을 매개로 스스로의 정체성, 욕망과 규범, 장소와 시간이 허용하는 아름다움의 개념을 확장해 온 것입니다. 사진기술의 발달과 함께 펼쳐진 20세기 패션사진은 여성해방과 더불어, 육체와 의상에 더욱 역동적이고 풍부한 관점을 부여하며, 시대유행의 흐름을 이끄는 에너지를 발산해 왔습니다. ● 헬무트 뉴튼(1920~2004)은 바로 그 패션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입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패션사진 이미지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큰 영향력을 떨친 것으로 평가받는 뉴튼은 미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을 무대로 세계적 패션 매거진(『보그』, 『퀸』, 『노바』, 『엘르』, 『플레이보이』 등)에 인물과 패션, 누드의 세계를 소개하며 그만의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 지난 1월,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헬무트 뉴튼의 이번 서울 전시회는 그의 창조성과 자유로움이 전성기를 이루던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엄선작 70여점을 선보입니다. 이번 서울 전시회에서는 그의 대표작 「빅누드(Big Nude)」시리즈를 비롯, 현란한 상황연출과 거침없는 상상력이 가미된 “패션”, 인물의 내면세계를 파고드는 “초상”, 사건현장을 연출한 “죽음” 연작 등 네 개의 커다란 영역으로 나누어 소개할 것입니다. ● 혹자는 상업적 목적을 지향하는 패션사진이 왜 예술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뉴튼이 제시하는 사진은 패션사진 이상의 지평을 활짝 여는 독특한 문화 코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신의 상상력을 치밀하게 현실화하고, 연출된 그 현실을 꿈의 세계로 오버랩시키며, 오직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사진세계에 집착한 뉴튼은 패션사진가로서의 활동영역을 철저히 수단화하며 또 다른 사진의 세계를 개척해 왔던 것입니다. 여성의 누드, 그것도 정장 아래 감춰진 아름다운 육체에 집착한 뉴튼에게 “패션은 열어 젖혀야 할 무대의 커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패션의 이면에 가려진 에로티시즘은 꿈과 욕망, 상상과 현실이 빚어낸 또 하나의 변주곡입니다. 옷의 ‘드러내기’와 ‘감추기’는 몸의 ‘드러내기’와 ‘감추기’ 게임으로 뒤바뀌어 제시됩니다. 전통적으로 관습화된 통념을 해체하여 재구성한다거나,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에 대한 접근을 통해 짜릿한 충격과 놀라움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그의 사진이 뿜어내는 매력에 빠져든 배우, 모델, 예술가 등 유명인사들은 기꺼이 뉴튼의 카메라 앞에서 그들이 지닌 내면세계를 거짓없이 진실되게 표현하는데 동참했습니다.



이번에 출품되는 작품 중에는 무척 자극적인 작품들이 일부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다루는 뉴튼의 작품세계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深淵)에 가라앉은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 오늘의 한국은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의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범람하는 이미지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웹(Web)으로 통칭되는 그물망을 타고 개인의 사적 공간까지 속속 침투해 들어가는 산더미 같은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거꾸로 ‘시각문맹자’로서의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지는 않는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던져야 할 지 모릅니다. 오늘, 20세기 패션사진의 중심부에서 활약한 헬무트 뉴튼의 사진세계를 살펴보는 일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에 두고 유익한 의제를 담론화하자는 취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헬무트 뉴튼의 드라마틱한 생애_1920년 헬무트 뉴튼은 부유한 유태인 단추공장 사장의 아들로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이미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12살에 저축한 돈으로 자기만의 카메라를 구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베를린 내 미국 학교에 입학하지만, 곧 퇴학당하고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 베를린의 유명한 패션, 인물, 누드사진 전문가 엘제 지몬 (이바 Yva)의 스튜디오에서 도제수업(1936~38년)을 받게 됩니다. ● 1933년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학살이 시작되었고 뉴튼은 당시 목격했던 나치와 공산당원 사이의 총격전을 잊지 못합니다. 1938년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이를 피해 가족들은 독일을 탈출하게 됩니다. 부모는 남아메리카로, 뉴튼은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이산가족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거기서 꿈에 그리던 프로 사진가의 세계에 뛰어 듭니다. ”Singapore Straits Times”에서 신문기자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곧 보조 사회부 기자직을 두 주만에 그만두게 됩니다. 사진을 찍는 게 너무도 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벌써 그의 사진을 특징짓는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진은 실제를 기록하는 사진이 아니라, 언제나 아주 효과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감동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 1940년 그는 호주에 정착하게 되고 5년간의 군생활을 마친 후 시민권을 취득하고 멜버른에 사진 스튜디오를 하나 열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여배우이자 자신의 사진 모델로 일했던 지금의 아내 준(June. 일명 앨리스 스프링스)을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의 사진 스튜디오 일이 결혼 이후에 아주 번성하였지만, 그는 1956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사진사가 되고 싶지 사업가가 되고 싶지 않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 영국에서 1년을 체류하고, 1957년부터 파리에 본격 정착하게 된 그는 파리의 독특한 분위기에 자극받아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며, 세계 굴지의 패션 잡지들에 사진을 선보였고 여기서 국제적 명성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 1975년 파리의 니콘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76년 그의 첫 사진집 『화이트 우먼』이 출간되었습니다. 또 이때부터 전세계로부터 다수의 상(The Tokyo Art Directors" Club Prize; American Institute of raphic Arts awards; and Germany"s Kodak Award for photographic books 외 다수)을 수상하며 그의 명성을 이어갑니다. ● 1985년에는 파리를 떠나 몬테-카를로로 이주했고, 일년중 수개월은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서 보내는 등 활발히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1987년에는 독일 본의 ‘라인 란데스’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치렀습니다. 독일 정부는 헬무트 뉴튼의 국경을 초월한 활약상을 인정하여 1992년 독일연방공화국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2000년 베를린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이어 헬무트 뉴튼은 지난해 2003년 독일 베를린시에 1천여점이 넘는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그가 나치를 피해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 본 마지막 빌딩중의 하나였던 서베를린 도서관 빌딩 사진박물관(Museum for Photography)에 말입니다. 이를 계기로 2004년 6월 전시회도 열 것을 약속했습니다. ● 그러나 2004년(83세) 1월 23일, 그는 이 전시회를 보지 못한 채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 호텔 근교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 2004년 6월 현재 베를린 뮤지엄에서는 지난해 작가가 기증한 작품을 소개하는 두개의 회고전이 동시 개최되고 있습니다. ‘Helmut Newton: Sex and Landscapes’ 와 ‘Helmut Newton und Alice Springs: Us and Them’ 입니다. 베를린 뮤지엄 운영감독을 전담하는 프루샨 문화재단(Purussian Cultural Foundation) 측은 “헬무트 뉴튼이 그토록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왔던 이 전시회가 결국에는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진가중의 한 사람을 추모하는 자리가 됐다”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 d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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